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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세대 TO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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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를 필두로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5포 세대',  
심지어 꿈과 희망마저 포기했다는 '7포 세대'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먹거리와 주변 환경은 풍족해졌지만, 불안한 현실과 갈수록 
고조되는 경제 양극화에 안타까움과 자조적인 씁쓸함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인데요.  

그런데 정작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세대는 따로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88만 원 세대도, 7포 세대도 아닌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세대 TOP3>를 알아보겠습니다. 

TOP 3. 1580년대 생  

밀레니엄 세대는 타인과의 치열한 경쟁을 넘어 
이제는 고도화된 인공지능 AI와 일자리를 두고 
대결해야 할지 모른다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죠.  

그러나 1580년대 조선에서 태어난 우리 선조들은 
차원이 다른 피 터지는 전쟁으로 일생을 시달렸다고 합니다.  

평생을 거듭하여 진행된 국내외 전쟁 때문인데요. 

1580년대 생의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라 할 수 있는 
10~20대 청년기에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임진왜란이 발발,
전쟁의 주 무대였던 조선에서 제주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토가 초토화되기에 이르렀죠.  

임진왜란 때 조선의 전시 병력 운용체제는 
전시 상황에 중앙 정부에서 사령관이 전장에 투입되면 
전장에 가까운 농민들이 무기를 갖추고 정해진 장소, 
정해진 시간에 모여 전쟁을 치르는 예비군 제도와 비슷했는데요. 

따라서 당시 1580년대 생들은 어린 나이에도 
전시 병력에 동원돼 왜구와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조선은 임진왜란의 여파로 경제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게 되면서 국력의 쇠퇴를 피하기 어려웠고  
이에 가장 활발한 경제 활동을 펼쳐야 했던 
청년기 1580년대 생들은 전후의 참상으로 큰 빈곤에 시달렸다고 하죠.  

1580년대 생들이 겨우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할 30대가 된 무렵! 

이번에는 명나라와 후금이 벌인 '사르후 전투'가 벌어지며 
당시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군도 파병돼야 했는데요. 

비슷한 시기 국내 정세도 잡음도 만만치 않았다고 하네요.  

1624년에는 인조왕 정권 수립 2년 만에 
인조반정 공신들이 '이괄'을 주축으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이괄의 난'이 발생,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반군이 
수도 한양을 점령하는 반란 전쟁이 일어난 것인데요. 

비록 약 3개월 간 짧게 진행된 봉기이지만 
관군 3만여 명이 투입된 규모로 보아 황주, 마탄, 안령 등 
당시 전투가 벌어진 도시 내 백성들의 피해는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0대부터 30대까지 바람 잘 날 없는 전쟁의 나날을 보낸 1580년대 생...! 
40대 이후 중년의 삶은 괜찮았을까요?  

애석하게도 이괄의 난이 종료된 지 3여년 후인 1627년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의 침입으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 
'정묘호란'이 발생하며 1580년대 생들은 또 한 번 전쟁의 한가운데 내몰리게 됐습니다. 

당시 후금은 광해군 폐위 문제를 구실로 쳐들어 왔다가 
조선과 협상을 벌인 뒤 다행히 형제의 관계를 맺고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전쟁 종료 후 9년 뒤 조선에서 무려 10만여 명의 병력이 투입된 
'병자호란'이 발발, 그간 숱한 전쟁을 거치며 
정권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조선은 크게 패하게 되었죠.  

그 충격과 영향은 임진왜란 못지않게 조선에 큰 타격을 입혔으니 
당대의 핵심 세대였던 1580년대 생들의 피해도 엄청났겠죠? 

말 그대로 일생을 전쟁에 시달린 1580년대 생들의 
생애를 살펴보니 꿈을 이루기는커녕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얼마나 큰 무력감을 느꼈을지 가위 상상조차 되지 않네요. 

TOP 2. 1660년대 생  

앞선 전쟁의 연속을 겪은 세대가 노인이 되었을 무렵 태어난 
1660년대 생들은 전쟁보다 더 무서운 기근에 시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굶어 죽는다는 말이 피부로 와 닿지 않는 
요즘 세대들에게는 '기근'이라는 단어가 생소할 따름이죠.  

그런데 현재까지 회자되고 있는 1670년 '경신대기근'과 
1695년 '을병대기근'은 일반 백성은 물론 고위 관료들까지 
떼죽음을 당할 만큼 국가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폭발적인 신체 성장을 거치는 10대 청소년기, 
1660년대 생들은 먹을 게 없어 굶주렸고 급기야 사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는데요.   

1670년 갑작스러운 흉작과 병충해로 인해 
곡물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한 동시에,   
강력한 태풍과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까지 유행하면서 
수도 한양을 비롯한 국토 전체에 대량의 아사자와 병사자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17세기 후반 높은 강수량 뿐만 아니라 
우박, 벼룩, 가뭄, 때 아닌 눈이나 태풍, 지진 등의 
자연 재해가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고 하네요. 

그야말로 식량 생산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모든 자연 현상이 동시에 일어난 초유의 사태!  

거기다 전염병까지 겹쳤으니 아사하는 사람은 
수천, 수만 단위로 보고됐고 어딜 가든 굶어 죽은 시체가 
거리를 가득 메울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병자호란이 끝난 지 3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라 
이러한 국가적 위기에 나라가 제대로 대처할리 만무했고,  
정치적 혼란까지 가중돼 경신대기근 발생 3년 뒤에는 
서인과 남인이 충돌하는 2차 예송 논쟁까지 발생하기도 했죠.  

심지어 기록에 따르면 앞서 발생한 양란을 겪고 
경신대기근까지 살아 있던 일부 노인들이 
차라리 전쟁을 겪었던 시대가 나았다고 말할 정도의 참혹함이 이어졌다고 하는데요. 

조선 팔도의 모든 백성들이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국적인 기아에 시달려야 했으니... 

일부 식인 사례까지 보고될 정도였지만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서는
굶주림이 너무 절박해 일어난 일이라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요즘 세대들이 칭하는 '헬조선'의 현실판이 
1660년대 생들에게 실제로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10대 시절을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른 심각한 배고픔으로 
보내야 했을 1660년대 생들은 30대에 또다시 한반도 역사상 역대급 기근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을병대기근인데요. 

지구 기온이 1℃ 가량 떨어지는 소빙기로 접어든 시점에서 
시작된 을병대기근은 경신대기근과 마찬가지로 
곡물 생산 과정에 큰 피해를 입히는 이상 기후 현상이 연이어 발생하며 악화됐습니다.  

당시 추정되는 조선의 전체 인구 1600만 명 중 
을병대기근으로 사망한 인구가 무려 400만 명! 

전체 인구의 1/4이 배고픔을 참다못해 희생됐고, 
당시 상황을 견디다 못한 숙종이 결국 치욕을 무릅쓰고 
청나라에 곡식 지원을 요청했을 정도라고 하네요.  

차라리 분노할 실체라도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아 맞서 싸울 수도 없는 굶주림에 
수십, 수백 만 명이 사망한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알고 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TOP 1. 1220년대 생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세대 1위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0대부터 40대까지! 거의 평생을 지긋지긋한 
몽골제국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던 1220년대 생들인데요. 

이들이 11살이 됐을 무렵 최초의 여몽전쟁이 시작되며 
1220년대 생들이 40대에 이르는 1259년까지 무려 9차례에 걸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220년대 생은 고려 전쟁사 중 최악의 암흑기로 꼽히는 위기를 함께 겪었죠. 

당시 칭기즈 칸의 주도 하에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한 몽골은 
서역을 정리한 뒤 중원으로 눈을 돌렸고 1차 목표를 금나라로 설정했습니다. 

결국 금나라가 몽골에 패하며 황하 이북을 몽땅 내어주자 
만주 벌판은 잠시 주인 없는 땅이 되었죠.  

이때 금나라에게 망했던 거란족이 만주에 부랴부랴 요나라를 세웠고 
이를 지켜보던 몽골군이 거란족을 공격, 
대대적인 피해를 입은 거란족 유민 수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와 고려 국토 내 곡식, 가축 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무능력했던 고려는 이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몽골군의 힘을 빌려 겨우 소탕했는데요. 
이를 계기로 고려에 불합리한 사례금을 요구한 몽골!  

이 와중에 고려에 들어온 몽골 사신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졌고 결국 국교가 단절되며 몽골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었죠. 

점령지를 남김없이 불사지르고 피정복민을 무참히 학살하는 
몽골 기병대의 잔인함은 고려를 짓밟았는데요. 

당시 10살 넘은 남자아이들을 이유도 없이 죽이는가 하면, 
여자와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가는 등 
몽골군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는 상당한 수준의 인명 손실과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1차 침입을 겪은 뒤 당시 고려의 권력자 최우 등 
주요 권신들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는 강화 천도를 강행하기에 이르렀는데요. 

도성의 백성들까지 전부 강화도로 떠난 1232년 고려가 
몰래 강행한 천도 사실을 알게 된 몽골이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또다시 고려를 침략했죠. 

하지만 당시 고려 정규군은 강화도 섬에 틀어 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나라의 보호 없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조직해서 몽골군에 대항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죠. 

심지어 백성들 스스로 영토를 지키는 동안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있었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는데요. 

이렇게 침입과 휴전을 무려 아홉 차례나 반복한 몽골과 고려의 백성들! 

1258년 전쟁을 고집하던 고려 무신정권의 수장 최의가 
암살되면서 고려는 몽골의 모든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항복하게 됩니다. 
드디어 1220년대 생들이 무려 30년 넘게 고통을 받은 기나긴 여몽전쟁이 막을 내리죠.  

바깥에서는 몽골군에, 내부에서는 강화도에 주둔하는 
무신정권의 무릉도원을 위해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1220년대 생들! 

그야말로 전 국토가 탈탈 털리는 상황에서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하는 꿈조차 꿀 수 없었을 것 같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오늘은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세대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물론 개인이 경험하는 고난과 역경은 상대적이기에 
어떤 시대가 더 힘들고 어려운지 절대적으로 평가할 순 없겠죠.  

하지만 스펙 준비 대신 전쟁 준비를, 취업 고민 대신 
먹을거리 걱정을 해야 했던 선조들의 일상을 알고 나니 
2020년 지금을 좀 더 소중히 여기며 살아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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