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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인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 TOP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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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그래서인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가진 역사적 사실도 참 많은데요.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으로 탈바꿈된 이야기도 적지 않습니다.

TOP 3. 은장도는 자결용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 소설 속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은장도. 여성들이 낯선 남자로부터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옷고름에 숨겨둔 은장도를 꺼내 자결하는 이야기는 더이상 특별할 것 없는 일종의 클리셰이기도 하죠. 그러나 우리에게 자결용으로 알려졌던 은장도가 사실 장신구에 불과했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은장도는 은으로 장식된 손가락만 한 칼 모양 장신구로, 조선시대 당시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판매됐고  여성의 경우 손 한 뼘 크기도 안되는 초소형 은장도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디자인이 워낙 화려하고 다양해서 옷고름에 매다는 일종의 패션 아이템으로 인기를 끌었는데요. 


사실 은장도를 활용한 자결은 당시 우리나라 유학적 도덕관에도 맞지 않습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관념이 매우 견고해 머리도 자르지 않았던 사회에서 쉽게 용인될 수 없는 방식인 것은 물론,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손바닥 크기보다 작고 짧은 칼로, 그것도 여성이 자신의 목을 찔러 죽음에 이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더욱이 조선 전기의 충신, 효자, 열녀 등에 대해 편찬된 <신속삼강행실도>를 봐도 724명의 열녀 가운데 칼로 자살을 선택한 사람은 24명에 불과합니다. 

급박한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확인 가능한 자살 도구는 부엌칼 아니면 무기입니다. 은장도를 사용한 사례는 1건도 없었죠. 그렇다면 이러한 '은장도 자결'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부터 만들어진 걸까요?  


관련 연구가들은 은장도로 자결하는 여성의 모티브는 일제강점기 소설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의 '가이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이켄이란 일본의 무사 집안 여인이 호신용으로 소지한 단검으로,  대체로 은장도보다 커 자결을 하기에 무리가 없었죠. 아시다시피 '사무라이' 문화를 지니고 있는 일본은 칼을 숭배하는 정서가 지배적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러한 내용을 다룬 일본 소설들이 대량으로 번안돼 국내로 유입되며  이른바 은장도 자결 이야기가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의 재미를 위해 극적인 픽션은 가미할 수 있다쳐도, 일제의 잔재가 조선 여성들의 정절로 둔갑한 것은 영 찝찝하네요.

TOP 2. 문익점은 목화씨를 몰래 숨겨 들여왔다?


고려 말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서장관으로서 중국 원나라에 방문했다 돌아오면서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가지고 들어와 고려시대 의복 기술에  혁명적인 공을 세운 것으로 인정받는 문익점. 특히 당시 원나라에서 국외 반출 금지 품목 중 하나였던 목화씨를 붓뚜껑에 몰래 숨겨 들여온 드라마틱한 이야기까지 전해지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 가사에도 등장할 만큼 역사적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죠. 그러나, 이른바 문익점 스토리에는 약간의 미화가 가미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는 목화씨를 '숨겨' 들어왔다기 보다  그냥 '가지고' 들어왔다는 기록이 밝혀진 것인데요. <고려사> 속 문익점 역전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원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 10여개를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와...'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야기에 스릴을 더해주는 '붓뚜껑' 내용은 문익점의 목화씨 반입 스토리를 더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싶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MSG라고 할 수 있죠.


더군다나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씨가 반출 금지 품목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는데요. 그 어떤 문헌에서도 원나라의 대외 반출금지품목에 목화가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고,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목화는 원나라 땅에 널리 퍼져있는 식물 중 하나였다고 해요.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목화를 고려에 들여오고자 굳이 숨기려는 노력까지 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거죠. 

게다가 지난 2010년에는 문익점의 목화 유입으로 인해 고려 땅에 처음으로 무명천 짜기가 시작됐다는 교과서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판명나기도 했습니다. 충남 부여 능산리의 6세기 백제 절터에서 나온 백제산 직물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면직물로 밝혀졌기 때문인데요. 고려시대의 문익점 목화보다 무려 600년을 앞선 면직물입니다. 


씨실을 강하게 꼬아 만드는 독창적 직조수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외국에서 백제로 목화씨가 전해졌으며, 면직물 자체를 백제에서 생산한 것이 확실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더해졌죠. 

국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숨겨온 것도 아니고, 최초도 아니라는 문익점의 목화씨 이야기. 그래도 당시 더운지역의 목화를 온대지방인 한반도에 들여와 시험 재배에 성공, 전국에 목화씨를 보급한 업적만은 인정받을만 합니다.

TOP 1. 한글 창제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가 함께했다?


요즘 한창 뜨거운 논란에 휩싸인 역사적 사실 하나를 꼽자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아닐까요? 대한민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가 쓰는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함께 만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은 세종대왕은 왕으로서 지시만 내리고 실질적인 한글 창제 업무는 학자들이 진행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죠. 

실제로 우리나라 성인 천 명을 대상으로 한국문화연대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중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한글은 세종대왕과 학자들이 '함께'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함께'가 아닌 '혼자'가 맞습니다. 조선 세종 때의 역사를 기록한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이 달에 상감마마께서 친히 한글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셨다"고 기록돼 있는데, 또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집현전 일부 학자들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하나도 이롭지 않은데 왜 굳이 힘을 들이고 애써 연구하십니까?"라고 세종의 한글 창제 업무의 부적절함을 상소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종의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학자들과 공동 작업을 진행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죠.


물론, 당시 학문 연구기관이었던 집현전이 세종의 한글 창제 관련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고 난 뒤,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 <훈민정음 해례본>을 편찬하는 데 나섰습니다.  

그렇다고 한글을 '함께' 창제했다고 볼 순 없고, 우리가 쓰고 말하는 한글은 100% 세종대왕의 업적이며, 이를 널리 보급하는 데 집현적 학자들이 보필했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한글을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창제했다고 알고 있는 걸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학교에서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인데요.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한 민족이 사용하는 글자를 인간 혼자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편견과 함께 세종대왕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의견들이 더해져 오늘날 공동 창제설이 더욱 견고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 역시 출처도 불분명한 신미스님의 한글창제설을 영화 소재로 사용,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죠. 가뜩이나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지는 못할 망정 세종의 업적을 폄훼하는 행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물론, 후세에 전해지는 고대의 역사 이야기는 모두 기록을 바탕으로 한 추정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해당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다면 정확한 뒷이야기와 배경을 알 순 없겠죠. 

그러나 수많은 고서와 기록들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을 전혀 다르게 전하거나, 거짓으로 일부를 조작하는 행위는 역사 왜곡과 다름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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